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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그것은 어느 겨울날의

Ep 01. 모험의 시작 Cpt 03. 섬광의 기사

 서역의 대륙에는 노예가 존재하지 않고 평민도 귀족도 살기 좋은 나라로 유명한 한 왕국이 있었다.

지금껏 몇 대 째 선왕과 국왕의 정치는 수많은 민생안정을 꾀하였고 상권을 같이 꾀함으로 백성에 대한 귀족의 권력을 줄이면서 귀족의 불만을 잠재우는 걸 꾀하였다.

비록 직접적인 권력은 많이 국왕 파에 묶였지만 그 대가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 귀족들은 큰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귀족들의 씀씀이에 의해 부가적인 경제 발전과 유통되는 자금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경제는 좋아져갔다.

귀족들이나 가질법한 취미활동도 백성들도 할 수 있었고 수많은 개척마을이나 이주민들이 왕국의 백성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많은 부를 갖더라도 사람의 욕심은 지나칠 수밖에 없었고 귀족들 중에서는 부를 넘어 왕국 전체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싶어 하던, 너무 큰 욕심을 가진 귀족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결국, 왕국력 117년, 사단은 발생하였다.


 "이런 조무래기는 백날 잡아봐야 의미가 없다. 국왕과 그 식솔들을 먼저 찾아라!"


부귀와 영광을 누리던 왕국의 왕궁에서 짙은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푸릇푸릇 싹이 터있던 이파리에는 새벽의 이슬대신 죽은 자의 핏방울이 맺혀 있었고 아침을 준비하느라 곳곳에서 피어올라야 할 음식 냄새 대신 혈향이 올라왔으며 궁을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수많은 비명소리가 들리고 함성소리가 들린다. 막는 자와 공격하는 자가 대치한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내가 근무를 위해 선임자와 교대하기까지 이런 사단이 발생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도 평화롭게 해가 뜨고 아침에 일어난 왕자 전하와 공주 마마께 문안을 드릴 거라 생각했다.


 "적습이다!! 모두 깨워라, 반란군이 일어났다. 근위병은 왕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어서 무장을 챙겨라!"


아닌 새벽의 외침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평화롭던 왕국에 반란이라니? 대체 어느 귀족이 불만을 가져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최근 일부 귀족과의 불화가 좀 있었다고는 하지만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던가?

나는 재빨리 전하, 마마를 모시러 궁 안으로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 왕국은 백성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내어줄 망정 대외에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시설 외에는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궁 안에 여러 식솔이 같이 거주하고 계신다.

내가 담당한 이 헤리우스 궁은 국왕의 자제분들이 거주하는 궁이다.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는 다른 담당자가 모실 터이니 난 이분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정원을 가로질러 내가 도착했을 땐 밖의 소리에 낌새를 챈 왕자 전하께서 공주 마마를 데리러 가시는 길이었고 왕자 전하와 직속 근위병들과 함께 공주 마마의 궁에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그곳의 시녀께 공주 마마의 채비를 급히 준비해오라 이르고 왕자 전하와 함께 공주의 방에서 공주 마마를 모셔왔다.

잠에서 덜 깨시긴 했지만 우리의 상태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공주 마마는 아무 말 없이 약간의 옷가지와 패물을 챙겨 우리와 합류하였다. 


일단은 왕궁이기 때문에 각 궁에는 탈출용 워프 게이트가 있고 항시 대기 중인 마법사가 있다.

우리는 헤리우스 궁의 탈출용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아래로 이동하였다. 막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돌아 경비에게 문을 열게끔 하려던 때.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궁내에 내모자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곳에는 경비병이 쓰러져 있었다. 무언가 일의 잘못됨을 알 수 있었다. 궁내에 내모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순찰중일 터였던 동료나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안이 엄습하였다. 재빨리 위로 올라가 본 나는 저편에서 기사들이 달려오는 걸 보았다.


 "공주와 왕자 전하 일행을 찾아라!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릴로 후작가의 문장이다. 우리를 도우러 나온 것 같았다. 재빨리 지원을 요청하려한 그때 주변의 아군을 마법으로 태우며 다가오는 후작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군이 아니었다. 그들의 적이란 황군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반란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지상으로의 탈출은 글렀다는 걸 깨달은 난 왕자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패를 이용하여 문을 열고 일단 들어가기로 하였다. 

마법 진은 문자 자체에 힘으로도 불안하지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방어를 하다가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다.

이미 위는 도망갈 길이 없는 이상 이곳에서 항전하다가 문자 자체의 힘으로 이동하면 된다. 워프에 필요한 마력은 마석에 충분히 충전되어 있을 테니까.

먼저 마법 진을 점령했을 내모자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그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재빨리 달려 내려간 우리는 막 마법사를 처리하려던 내모자를 발견하여 마법사를 그로부터 구해냈다. 마법사의 안전을 먼저 확인한 뒤 내모자가 누군지 살펴보니 글쎄 공주의 직속 기사단원 중 한명이었다.

견갑의 표식을 보아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신입으로 이번 일을 위해 일부러 심어놓은 기사인 것 같았다.


 "밀피오 경, 몸은 괜찮소?"

 "리벤저 경, 육체라면 야 일찍 와주셔서 문제는 없지만 저자식이 차에 타놓은 프로즌 마나 때문에 마나를 운용할 수가 없소."

 "그럼 문자와 기사들의 운용에 의지해야만 하겠군요."

 "그렇소, 기사들의 마나 운용이라 해도 정해진 위치에 흘려보내기만 해도 작동은 할 터이니 문제는 없지만 정식 마법사가 아닌 만큼 이동은 불안정할 수 있소."


허나 지금 상황으로는 위험부담을 가지고 서라도 왕자 전하와 공주마마를 탈출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단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신 듯 하더니 왕자 전하께 전하와 측근 기사들을 먼저 보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샤를로트' 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이 애는 이제 열다섯 살이란 말입니다. 골든 로드 기사단장, 당신의 충정임을 이해합니다. 허나, 전 아직 괜찮으니 이 아이 먼저 보내주세요."

 "하오나.."

 "오..오빠"


놀란 가슴이 이제 좀 진정이 되셨는지 공주 마마께서 예전의 호칭을 그대로 부르셨다.


 "샤를, 오라버니도 곧 뒤따라 갈 터이니 너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골든 로드 기사단이 함께해줄 것이다. 오라버니 걱정은 하지 말거라. 내 실력은 너도 잘 알잖니?"

 "아니야. 아니, 오빠 실력은 나도 잘 알지만 그렇지만, 저들 또한 오빠와 비교할 수 없게 오랫토록 수련한 기사들이잖아? 오빠가 이길리가 없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탈출하자, 응?"

 "샤를로트! 오빠를 믿지 못하는 게냐! 오빠는 어련히 탈출할 테니 먼저 탈출 해다오. 우리 둘다 같이 빠져 나가면 둘다 추격에 잡힐 뿐이다. 여기선 따로 탈출했다가 나중에 합류하는게 좋아. 너와의 첫 여행을 했던 '그 곳'에서 만나자꾸나. 단장, 부탁하오."

 "하아, 왕자님의 고집은 예전부터 황소 고집이셨던 것은 제가 잘 알지요. 골든 로드 기사단은 들으라. 기사단을 셋으로 나누겠다. 기뮤 부단장을 필두로 여하 기사들은 공주 마마와 측근 호위 기사를 따라 먼저 탈출한다. 워프한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마력을 공급하지 않는 기사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라."

 "알겠습니다. 나 기뮤를 필두로 휘하 기사들은 나를 따르라. 공주 마마를 모시고 밖으로 피신한다."

 "예!"


나 또한 기뮤 부단장 휘하였으므로 공주 마마를 지키기 위해 게이트의 변두리에 마나 주입구에 맞춰 올라섰다.


 "기뮤! 준비는 다 되었나? 적군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예, 발동만 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왕자 전하께서 공주 마마를 그윽이 바라보셨다.

그 눈빛에는 뭔가 애처로움이 남아 있었다.

잠시 돌아서던 전하는 기뮤 부단장에게 무언 가를 던지셨다.


 "기뮤 경, 나의 여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전하께서도 옥체 건강하시어 다시 뵐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잠시 단장님을 바라본 부단장께서는 목걸이를 공주 마마의 목에 걸어드리며 마나주입을 명하셨다.

난 명에 따라 지정된 양만큼 마나를 부여했고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그릴로 후작의 고함소리를 끝으로 우리는 어딘가로 빨려가듯 이동하였다.


아~우~~컹컹


 "으음,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대체..."


난 수풀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같이 이동했던 기사들과 공주 마마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안정했던 만큼 불시착을 했던 듯 하다. 충격에 오랜 시간 기절해 있었는지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어있었다.

나무 같은 데에 몸이 끼어 죽은 동료가 없기를 바라며 마법사에 대한 대처법을 위해 공부했던 마나계측법 이론에 근거한 나는 워프가 불시착을 해도 100미터 안에 대부분 다 도착을 한다는 점에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검이나 바위에 끼어 빼내려는 동료가 보인다. 갑옷이 걸려 나무를 베어내는 동료도 보이고 장구류 한둘 잃게 되기는 했지만 다들 몸은 무사한 듯 하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동료들을 확인하며 최우선으로 공주님을 찾아다녔다. 얼마 안가 나는 달빛을 받으며 나무 아래에 서 계신 기절해있는 공주님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공주 마마의 오른팔이 나무를 관통하고 있었다.

내 눈을 믿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나의 군주시여.. 고통에 의해서인지 아직 기절한 상태에서 깨신 적이 없는 진 모르겠으나 나무에 오른팔이 박힌 팔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이, 이런.."

 

뒤를 돌아보니 부단장님도 상황을 파악하신 듯 하다. 하나 둘 상황을 수습하던 기사들도 상황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단장님, 공주 마마의 팔을 꺼낼 방법은 없습니까?"

 "…….시간이 여유롭다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도망중인 현재로써는 방법이 없다. 믿고 맡겨주신 전하께는 죄송하나 공주마마의 팔을 절단하는 수밖에."

 "절단이라뇨? 제가, 제가 어떻게든 나무를 베어보겠습니다 그러니 절단만큼은.."

 "리벤저 경! 정신을 차리라. 지금 우리는 쫒기는 상황이다. 언제 역추적을 하여 우리의 행방을 찾아낼지 모른단 말이다! 차라리 공주 마마의 팔 한쪽으로 마마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마마께도 싸게 먹히는 거야."


그럴 순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제발, 제발 기회를 주십시요."

 "시끄럽다. 이봐, 우리는 지금 한시가 급하다. 왕자전하와 일행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도망쳐야한단 말이다!"

 "안됩니다!!"

 "이런 멍청한 자식! 이 자식 끌어내!"


동료들이 나를 잡아 끌어내려고 한다. 재빨리 공주 마마를 붙잡은 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부단장께 몇 대 맞고선 공주마마로부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이정도로 떨어져 나가진 않겠지만 내가 붙잡음으로써 팔에 더욱 크나큰 고통이 생길 공주마마 생각에 나도 모르게 놓았을 지도 모른다.

부단장님의 칼이 번뜩이고, 이내 아래로 내려쳐진다.

고통에 깨어난 공주님은 가슴을 푹 찌르는 비명을 지르다 이내 다시 기절하셨다.


나의 공주님, 사랑하는 나의 공주님. 당신의 옥체를 보전하지 못한 신을 용서하지 마소서..





미온왕국력 117년 5월 17일

최대한 달려 이동하였던 우리는 삼일 째 되는 날에서야 해가 뜨기 전 적당한 터를 잡고 숙면을 취하였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끔 땅굴을 파 은막을 치거나 나무뿌리 속에 숨어들어갔다. 보초는 은막 사이로 때로는 나무위에서 적의 이동이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교대로 그동안의 숙면을 취한 우리는 지도를 펼치고 대략적인 위치를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미온왕국력 117년 5월 21일

지나가는 산짐승을 잡기도 하고 풀도 뜯어가며 동맹국으로 이동하였다.

우선은 동맹국으로 피난을 간 뒤 공주 마마의 팔을 고쳐내는 것이 우선이다.

도중에라도 신전이 보인다면 팔을 고칠 수 있는지 확인해보며 계속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04일

문제가 생겼다.

인근 도시로 정보를 알아보러 간 동료들이 돌아오질 않는다. 

무언가 좋은 정보가 있기를 바라며 며칠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07일

며칠 째 동료들이 안 보인다.

근처를 통행하는 주민을 통해 물어보니 웬 기사들이 도시 경비대에 붙잡혀 감금되어 있다고 한다.

그 기사들은 필시 우리 기사가 분명하다.

이 앞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였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08일

위험하다.

결국 우리의 위치가 들통 나 버렸다. 

동료를 잡은 영주는 그릴로 후작에 의해 새로이 부임한 신임영주였다.

당연 우리를 잡아 권세를 더욱 부강하게 하려는 어리석은 귀족 중 한명이었다.

잡힌 기사들의 신분은 확인하고는 일대를 꼼꼼히 수색케 했음이 분명하다.

경비대와 기사단에 기습을 허용하였고 우리는 공주 마마를 보호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17일

하나, 둘 동료들이 죽어나갔다.

공주 마마의 팔을 잘라냈음에도 그들은 공주마마의 혈향을 통해 금세 우리의 뒤를 쫒아왔다.

하나 둘 적을 막으려 자신을 내던졌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겨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벌려놓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나 동결이 풀린 밀피오 자작은 공주 마마로 변하여 부단장과 함께 시간을 벌러 나와 공주마마만 남기고 멀어지셨다.

시간을 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노력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그전에 나의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우선 공주 마마의 잘린 팔부터 해결해야한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24일

결국 체력이 완전히 고갈난 공주 마마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쓰러지셨고 며칠 째 헉, 헉 신음소리만 가득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다.

무리도 아니다. 팔의 절단으로 많은 피를 쏟고 이후로도 제대로 된 식사나 휴식을 갖지 못하였다.

궁에서 편히 계셨을 공주님으로써 이 정도까지 버텨주신 것만으로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식량을 조달하러 마을에 다녀오니 대 신전들이 모여 있는 로조 시에 이번에 대단한 신성력을 가진 수련사제가 있다고 한다. 

수련 사제 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력이 주교 급에 달했으며 이대로라면 조만간 사제로 부임됨과 동시에 추기경단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있는걸 보아 대단한 수련사제임이 분명하였다.

그 사람을 찾아내면 공주님의 팔쯤은 금세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공주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자 매우 기뻐하셨다.

어서 이 공주 마마를 위하여 로조 시에 도달해야만 한다.




미온왕국력 117년 6월 30일

결국 적에게 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로조 시까지는 고작 반나절 거리도 안 된다.

로조시가 코앞인데 공주님의 팔을 고치진 못할망정 공주님께서 죽임을 당하게 생겼다.

그럴 순 없다. 

나의 목숨도 마저 바쳐서라도 공주님께서 치료를 받게 해드려야 한다.

비록 궁으로 다시 돌아갈 힘이 없어지더라도.



 "꽤나 질긴 녀석이구나. 그러니까 여기 까지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이제 너의 운도 여기서 끝나나 보구나."

 "나의 운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 운명의 실은 잣대여 봐야 아는 거 아닌가?"

 "호오.. 아직 할 말이 많이 있나 보고만.. 그런데 어쩌나.. 우린 바쁨모.."

 "닥쳐! 나 역시 바쁘다. 잔말 말고 덤비지 그래. 나무 위의 녀석들도 치우시지."


나무 위는 혹시나 해서 찔러본 것이지만 그자가 어깨를 으쓱하자 몇 명의 어쌔신이 내려앉았다.


 "의외로 감이 좋은 기사님이셨구먼. 아까워.. 내 부하가 되지 않겠냐고 한다면 당연 거절하겠지..?"

 "당연하지. 나의 주군은 공주님 한분뿐이시다."

 "리벤저 경.."


나의 말에 공주님은 눈물을 글썽이셨다.

여전히 어릴 때나 지금이나 눈물이 많은 공주님이다.

그렇기에 좀 더 공주님을 지켜주고 싶을지 모른다.

지금은 이런 상황이 되었지만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더 많이 보여드리고 싶었다.


 "왕자 전하는 어떻게 되었지?"

 "왕자? 아 '전' 왕가의 왕자 말인가? 그자라면 왕성에 잘 가둬두고 있지~"

 "뭐?!"


왕자 전하께서는 공주님을 위해 시간을 버티다가 결국 잡히신 듯 하다.

왕자 전하를 뵐 면목이 사라진다.

전하께서 벌어주신 시간은 결국 공주님께서 잡힐 시간을 조금 연장해주신 것 밖에 되질 않았다.


 "뭐, 곧 죽을지도 모르지만, 거기 공주님의 목에 걸린걸 우리에게 주면 로조 시로 살려 보내 줄 수 도 있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놓고 다시 죽이려할 걸 모를 줄 아느냐. 이곳은 공주 마마가 아닌 너희의 무덤이 될 것이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먼저 간 동료들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공주님만은 탈출시키자.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공주님만은.

난 조용히 공주님을 감싸 안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공격 태세에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불리하지만 적어도 내가 발목쯤은 잡아둘 수 있겠지.

 

 "공주님, 조용히 제 말만 잘 듣고 있다 따라해 주십시오."

 "네?"

 "조용히 들어만 주세요."


잠시 공주님께서 조금 진정할 시간을 드린 뒤 난 이어서 말씀드렸다.


 "제가 이들의 발목을 최대한 잡아보겠습니다. 공주님은 제가 신호를 보내면 제게 떨어져 로조 시로 뛰어가세요."


순간 공주님이 다시 경직됨을 느낀다. 상대방은 자신들이 한참 유리함을 알기에 그저 느긋하게 다가올 뿐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동안 공주님을 위해 죽어간 기사들과 신하들을 생각해 주십시요. 이것이 마지막 방법입니다."


비록 어리시지만 나이 열다섯이 그리 어림이 아닐 것이다.

약간이나마 상황파악이 되시는 공주님은 입술을 잘근 깨무실 뿐이다.

이제 시간이 없다. 적과의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공주님을 탈출시키려면 내가 먼저 적의 기세를 끊어야만 한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꽉잡으세요 공주님. 그리고 부디 사셔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아까부터 유심히 봐두었던 적발 사내를 항해 달려 나갔다. 

그자가 이중에서 가장 검 끝이 떨려왔고 방향 또한 로조 시 방향이었다.

적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발목을 잡는 게 목적인 난 그자를 공격하는 척 넘어뜨려 적의 진로를 방해한다.

공격하는 척하면서 내보낸 검으로 그 뒤 빈곳을 파고들었고 디딘 발을 축으로 옆으로 휘둘러 적 한명을 베어 넘겨 거리를 확보했다.

옆에서 피가 솟아올랐지만 공주님은 생각보다 잘 버텨내 주시고 계신다.

적이 주춤한 사이 마저 달려간 나는 약간의 마력을 부여해 궁사수의 활을 끊고 베어 넘겼다. 마법사들의 마법에 스쳐 맞긴 했으나 도망이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린 적은 내가 부상을 당해 빠르게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위안삼아 빠르게 나를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등에 간간히 화살이나 마법이 날아왔지만 미리 진로를 읽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죄 피하거나 검으로 쳐냈다. 


 "크윽"


아무리 훈련을 받았다 해도 한 사람을 지키면서 도망치기란 힘들기에 한두 발씩 데미지는 축적되어갔다. 

적군이 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발견한 나는 재빨리 공주님을 말에 태워 보내고 적의 발목을 잡기 위해 돌아섰다. 


조금만 더 넘어가면 로조시의 관도다. 관도에서 까지 그들이 대놓고 쫒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의 복병이 더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오산이었다.

방심은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는 듯 관도로 진입하기 전 공주님의 말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공주님!!"


공주님이 향한 관도 근처의 나무에서 몇 명의 복병이 더 나타났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관도에만 어떻게든 다다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말이 있으니 보다 수월할거라 생각하고 자세히 확인도 하지 않고 예상보다 일찍 공주님을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막 적과 마주치려던 난 적당히 쳐내고 공주님께 달려갔다. 화살이 박혀왔지만 아랑곳 않고 공주님만을 보았다. 


너무 늦는다. 


데미지가 축적되어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온다.

적의 복병의 칼은 빠르다. 공주님이 곧 죽는다.

안 된다. 공주님은 나의 주군, 나의 사랑, 나의 마지막 존재 의의.. 


아아, 신이시여. 공평한 신이시여. 공주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 왜 저 악한 무리에게 죽임을 당해야합니까.

오히려 벌은 저자들이 받아야 함이 아닙니까.

당신들이 공명정대한 신이시라면 제게 힘을 주소서. 공주님을 지킬 힘을 주소서.

당신들을 복음을 전파할 사제가 필요하다면 저를 쓰소서. 사제들을 지킬 기사가 필요하다면 저를 쓰소서.

저를 어찌 쓰셔도 좋으니 제발 저의 공주님을 살려주소서. 살릴 힘을 주소서.


나의 착각일까. 세상의 시간이 점차 느려져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몸이 가벼워지고 빨리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떤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대의 공주에 대한 사랑은 이미 아노라.

  허나 세상에는 선이 있으면 그만큼 악이 있는 법.

  죽음에 대한 운명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허나 그대의 공주는 아직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니 내 너에게 힘을 주마.

  또한 나의 자식을 보내주마.

  그때까지 버텨내면 너와 너의 공주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공주님을 내려치려는 검을 쳐내고 그 옆의 적의 팔을 베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 검을 쳐낸 자의 팔도마저 베어낸 뒤 주변의 복병을 하나 둘 베어내었다.

나는 움직이지만 적의 움직임은 매우 둔했다. 마치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듯 한 기분이었다.


화살과 마법이 날아온다. 너무 느리다.

화살의 경로는 다 보이고 마법은 거북이처럼 기어왔다. 공주님 곁으로 날아오는 모든 화살을 쳐내었고 마법의 진로를 쳐내어 바꾸거나 베어 소멸시켰다.

다가오던 적의 기사들의 검을 든 팔을 베어 넘기고 막 말에 올라타려던 적장의 안장을 끊어내었다.

공주님을 지키기 위함이라지만 저들도 악인이 기전에 한 명의 인간이자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터였다.

상관의 명이나 고용주의 뜻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인 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가려낼 수는 없다.

나에겐 생명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갈 권리는 없다. 이는 신전에서 판단해 죄질에 따라 벌하여 줄 것이다.


로조 시에서 말을 탄 무리가 달려옴이 보였다.

급히 뛰쳐나온 듯 머리가 산발인 자도 있고 의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고 보인다.

하얀 법복을 입은 사제 무리도 보인다.

사제 무리의 선두에 있는 사제는 특이한 사제였다.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머리칼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검고 짙은 머리칼..

그 생각을 끝으로 나의 정신은 끊어져 나갔다.





무언가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에 이런 기분을 느껴본 때가 언제일까?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나를 감아쥐었고 서서히 긴장이 풀려가던 나는 다시 깊은 꿈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몇날 며칠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들 때 마다 힘이 없어 누워만 있었던 듯하다.

몸은 전부 완쾌된 듯 아픈곳이 느껴지지 않는다.

팔을 움직이려니 오른팔이 살짝 묵직하였다.

간만에 눈을 뜨려니 잘 떠지지 않는다.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뜰 수 있었다.

일단 뜨인 눈을 마저 뜨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떠올린 눈으로 나의 오른 팔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내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내가 잘 아는 사람.

공주님께서 나의 간호를 도맡아 해주신 것 같다.

다행히도 우리는 무사히 구출된 듯싶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내 앞에 문득 먼저 떠나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 깨어나셨네요?"


밝은 목소리가 내 귀를 울린다.

방안을 둘러보니 문가에 하얀 법복을 입은 여사제가 한분 보인다.

별다른 표식이 없는 수련 사제였다.


지긋이 바라보니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구출하러 달려와 준 사제 중 가운데에 있던 검은 머리칼의 사제였다.


 "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걸까……."

 "아, 죄송합니다. 저를 구해주신 사제단 분이시군요. 그 검은 머리칼 덕에 알아봤습니다."

 "헤~ 제 머리카락이 좀 특이하긴 하죠? 이 근방에서 검은 머리카락은 매우 귀하다더라고요."

 "그야 다들 블론드나 적발과 같은 다양한 색이니까요.. 동쪽에서 오셨나봐요?"

 "네! 동쪽이 제 고향이에요! 얼마 전에 도착하여 신의 가르침에 대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소문이 뭐였지? 이번에 로조 시에 얼마 전 대주교가 데려온 수련 사제가 대단한 성력을 가졌다고 하지 않았나?


 "잠시 만요. 혹시 수련 사제로 들어오실 때 직접 사제가 되고자 찾아 오신건가요? 아니면 대주교님을 통하여.."


 "음~ 굳이 말하자면 대주교님을 통해서일까.. 네, 아돌레스 대주교님을 따라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그럼 저기, 그, 저.."

 "네, 말씀하세요."

 "사제님의 성력이 주교 급에 달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겠사오나.."

 "여자 분의 팔이라면 이미 치료해드렸습니다."


그 말에 난 공주님이 내 위에서 잠든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일으켜 공주님의 오른팔을 확인하였다.

절단되기 이전과 다름없이 팔이 생겨있었다. 심지어 흔한 흉터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드디어 공주님께 팔을 돌려드리고 안전한 곳에 모실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훗날 꼭 보답하겠습니다."

 "에에..보답이랄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요. 본래 이런 일이 제 직업인걸요."

 "아닙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이분께서는 보답을 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분이 누구시기에 그러는 건가요?"

 "이분은.. 블랑가의 차녀 되십니다."


 "블랑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이곳의 정세를 잘 모르는 듯하였다.

 

 "블랑 왕가의 공주라면 얼마 전 유일하게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그 공주로구먼."


이때 병실로 하얀 수염의 대주교 복장을 갖춰 입은 노인이 들어왔다.


 "네?! 왕가요?! 그럼 저 아이가 공주??"

 "'전' 공주겠지. 지금 블랑 왕가는 초토화가 되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 대에는 재기하기는 힘들게야.."

 

 "저, 전 미온왕국의 골든 로드 기사단의 일원인 리벤저 남작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자네들 이야기니 자네들도 알아야 겠지."

 

거의 한달 넘게 듣지 못했던 미온 왕국의 사정이다. 블랑왕가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쉬쉬해서 알 수 없었지만 대주교 급이라면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우선 그릴로 후작은 당분간 정식으로 왕가로 인정받기는 힘들걸 세. 내부에서는 의외로 많은 자들이 후작의 곁에 붙어있더군. 왕의 신물까지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까지는 넘어가지 않았던 것 같네."

 "국왕께서는 무사하신 거군요?"

 "그걸 알 수 없다는 게지.. 그 사건 이후로 국왕의 소식은 알 수가 없소. 왕비는 독방에 갇혀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하고.. 왕궁 내에는 왕자일행밖에 없는 듯 하네. 왕자라도 신물이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헤리우스 궁과 왕자를 아무리 수색해도 그 신물은 찾을 수 가 없었다고 하네."

 

분명 마지막에 왕자님이 공주님 목에 걸어주신 것이 그 신물이자 증표일 것이다.


 "재기하기 힘들거라는건.."

 "백성들은 여전히 블랑왕가가 다스리기를 원하고 있어. 하지만 주변 왕국에서는 그들을 도우지 않을 거요."

 "그, 그런.."

 "그야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지 않는가? 주변 왕국에서는 기존에는 공생을 위해 동맹을 맺었을 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블랑 왕가를 다시 왕위에 올리는 것보다 그릴로 후작의 뒤를 봐주는 척 내정간섭을 하거나 왕국을 뺏는 것이 더 이득이란 말이지.."


그래서인가.. 동맹국으로 찾아가던 중 생각보다 빨리 발각된 이유가..

드러난 샛길은 첩자가 더 잘 안다고 타국의 첩자망 정보를 끌어들인 것이 분명하다.


 "저 공주가 왕의 신물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란 말이지.. 여전히 블랑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군사력이 너무 약하다네. 나로썬 이대로 조용히 살아가는 걸 추천할 뿐이야.."


하루아침에 공주위에서 박탈당하게 된 공주님..

제가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비록 이제 기사는 아니지만.


 "흠,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하네."

 "제안이라 하심은..."

 "실은 우리 수련 사제와 기사들이 말하기를 자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적을 해치웠다지?"

 "음.. 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갑자기 제 몸이 매우 가벼워 졌다는 것과 누군가 제 귀를 간질였던 기억은 있습니다."

 "오오오오오!!"


옆에 있던 수련 사제가 매우 놀라는 눈치이다.


 "허허, 역시 내 예상대로인가.. 실은 자네가 싸웠던 자들 중 죽은 자는 단 세 명. 아마도 몸이 가벼워지기 전에 베어 넘긴 자들이겠지? 그 이후로 자네에게 공격당한 자들 중 단 한사람도 죽은 자가 없네. 전부 치명상을 비껴나갔어."


그 많은 적을 내가 해치웠다는 점, 그리고 전부 치명상이 아니라는 점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그 많은 적을 해치우려면 한 타에 치명상을 가하더라도 힘들다.

그런 적을 전부 치명상 하나 없이 해결했다고? 그것도 내가?


 "또 자네가 싸웠던 장소에서는 우리의 신이 계셨던 흔적이 있는 점, 우리는 신탁을 받고 그곳으로 이동하던 차였다는 점. 그 만큼 화살에 꼬챙이가 되고도 갑작스러운 몸의 가벼움과 귓가의 속삭임."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네 목덜미의 아이리스 꽃."

 "아이리스 꽃이라뇨?"

 "옆 탁상위의 거울로 한번 확인해보게."


재빨리 옆의 탁상에서 거울을 꺼내든 나는 목덜미를 확인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왼쪽 목덜미에는 붉은 은빛의 아이리스 꽃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본래 피부인양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이리스라면 생명의 신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그때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일까?


 "그 상징은 자네가 신께 선택되었다는 증거. 게다가 주변 상황이 더욱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지. 이에 원한다면 자넬 우리의 성기사로 봉하고 공주마마와 함께 신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네. 어떻게 하겠는가?"


이건 기회지만 공주님께 왕국을 돌려주려면 이는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왕국은커녕 그 전에 죽어나갈지도 모른다.


 "공주마마는 어떤 식으로 신전에 소속됩니까?"

 "신력은 없고 검술을 하는 것도 아니네. 그렇다고 신의 말씀을 배우며 수련하지는 않을 테고 말이야. 자네가 동의한다면 방랑사제로써 소속되겠지. 물론 겉으로 보이는 신분뿐이지만 말일세."


공주마마도 방랑사제지만 사제로써 등록된다면 나는 사제를 모신다는 명목 하에 왕권을 되찾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주님께는 후에 사정을 잘 말씀드리자.


 "좋습니다. 아이리스 신전에 들어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허허."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전' 미온왕국 골든 로드 기사단 볼프강 F. 리벤저라 하며, 이분은 미온왕국의 블랑왕가의 차녀 샤를로트 조슈아 드 미온 블랑 되십니다."

 "나는 아이리스님을 보필하고 있는 아돌레스 르 아이리스 대주교라 하지."

 "전 얼마 전 아돌레스 대주교님을 따라 동방에서 온 수련사제 시아 민이라고 합니다."